영웅 레이드 경험담

2020. 6. 26. 06:47Game

 

  나는 2017년 5월 창천 시절 부터 파판14를 해왔다. 전투 컨텐츠를 주로 즐기며 그 중에서도 24인 연합 레이드를 가장 좋아하고 극 토벌전은 종종 하고 싶을때 하는 정도다.

  이 게임의 전투 컨텐츠(PVE)에 대해 잠시 설명하자면 던전/토벌전, 일반 레이드, 연합 레이드, 극 토벌전, 영웅 레이드, 절 레이드 순으로 난이도가 상승하며 극 토벌전부터 하드 컨텐츠(게임 내 정식 명칭은 고난도 임무)로 분류된다. 즉 이 게임 내의 분류 기준으로 나의 전투 피지컬은 일반적인 수준이었다.

  좋은 장비 혹은 칭호 때문에라도 영웅 레이드(이하 영식)에 도전하고 싶은 호기심이랄지 호기로운 생각이 몇 번 든 적은 있다. 하지만 공략 영상만 얼핏 봐도 눈이 돌아갈 정도였던지라 내 수준으로 '감히' 영식에 도전해도 될까? 하는 생각이 더 압도적이였다. 때문에 확장팩이 두 번 패치되는 동안 게임은 즐거우려고 한다는 말을 되새기며 스스로 도전 의지를 꺾어왔다. 자세하게 적지 않은 복합적인 문제가 있긴 하지만, 일단은 쫄보라서 기피했다고 해두자.

 


 

  내가 각성편의 영웅 난이도(이하 각영)에 덜컥 도전한 건 어느 화요일 주제한 초기화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초기화까지 딱히 할 일이 없었던 나는 문득 각영 1층이 쉽다며 주변에서 권유하던 얘기가 떠올랐다. 구경이라도 하려 공략 영상을 찾아보니 과연 최근에 클리어한 극 하데스 토벌전과 비교해도 꽤 할 만해보였다.

  도처에서 장비를 파밍할 수 있는 후발 복귀 유저였기에 아이템 레벨은 이미 충분했고, 파티 찾기에 마침 초행팟이 보여서 이끌리듯 파티에 들어갔다. 클리어를 하면 물론 좋겠지만, 그렇지 못해도 항상 궁금했던 영식을 경험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예정이었다.

각성편 1 클리어 컷신

  그리고 정말 클리어를 했다. 처음 들어간 파티는 전멸기까지 보고 해체되었고 같은 날 다른 파티에서 클리어했다. 내 캐릭터는 에덴 프라임을 토벌한 것이 자랑스럽단듯 씨익 웃었지만, 그 얼굴을 보는 나는 "내가? 영식을? 깼다?"는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허탈하게 웃었다. 아무튼 이 날부터 돌이킬 수 없는 영식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을 깼는데 나머지 2, 3, 4를 안 깨면 굉장히 거슬리니까!

  물론 1층이 좀 특이했다뿐이지, 이 뒤는 '영웅'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난이도였다. 더군다나 하드 컨텐츠의 기믹 처리는 단체 줄넘기와도 같아서, 한 명이 실수하면 파티 전체가 무너지기 십상이니 더더욱 어렵게 느껴진다. 혼자 줄에 걸렸을 때의 어쩔 수 없는 미안함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영식 트라이중 느낀 감정은 극 토벌전 트라이로 익숙해진 것 그 이상이었다.

  보고 듣고 겪은 대로 극 토벌전과는 차원이 달랐고 그 때문에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뜩이나 긴장한 상황에서 느꼈던 기믹 처리 실패에 대한 분노, 다른 파티원들에 대한 자책감, 실수를 반복하는 자신에 대한 탈력감 또한 '영웅'급이었다. 나 자신을 향한 부정적인 감정과 그로 인해 자신감이 떨어지고 심지어는 스스로를 깎아내리게 되는 것. 이게 파판14를 시작한 지 4년 만에 처음 도전한 영웅 레이드에 대한 날것 그대로의 감상이자, 영식 트라이/파밍 중에 내가 가장 힘들어했던 점이다.

  도중에 그만둘 생각도 수없이 했었다. 본래 피지컬이 좋고 하컨에 익숙한 하컨맨들은 어떤 생각으로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정도로 압박이 심했다. 게임에 과몰입한다고? 본인 실수 때문에 초읽기 수십 번 돌리다가 채팅창에 "저 여기까지 해볼게요 수고하셨습니다" 떠봐야 이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극한의 스트레스 상황에 놓여있다보니 캐릭터가 죽을 때마다 현실에서도 비명을 마구 질러댔다. 늘 집에서 게임을 해서 망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클리어하기로 마음먹고, 정말로 해낼 수 있었던 건 나락으로 굴러떨어졌다가도 클리어를 해내면 더욱 강해지는 자신감과 개고생 끝에 결국 공략에 성공했을 때의 즐거움 덕분이었다. 성공에 대한 좋은 경험이 있다면 이후의 실패는 좀 더 잘 견뎌낼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각영 1층은 의도적으로 설계된 것일지도 모른다.

 


 

  지난 9주는 4년 동안 그냥저냥 살던 사람이 갑자기 2개월 단기 집중 트레이닝을 받은 기분이었다. 사실 가르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나 스스로 한계를 느껴서 뭐라도 해본 것이 전부다. 다양한 공략 영상과 시점 영상을 보고, 타임라인 시트도 읽고, 커뮤니티도 검색해보고, 아예 초심으로 돌아가서 딜싸도 다시 점검하고, 레이드용 HUD 배열과 매크로도 만들고, 스킬 단축키도 새로 지정해봤다.

  그렇게 갖가지로 발악(...)한 덕에 기믹 반응 속도는 확실히 빨라졌다. 객관적으로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기본 게임 센스도 조금은 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물질적 소득이나 특정한 성과보다는 내 안의 하드코어 파판14 유저로서의 면모, 파판14에서 내가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재미를 발견했다는 것에 가장 의의를 두고 싶다.

  단순히 선행 퀘스트나 장비가 필요한 것이라면 준비해서 한 번 가봐라, 하고 넌지시 던지며 끝맺을 수 있었겠지만 낡은 피지컬에 더 낡은 멘탈을 가진 본인의 경험상 섣불리 도전을 권하고 싶진 않다. 난이도 만큼 얻는 재미도 크지만 예기치 못한 멘탈 리스크가 있을 수 있으니 심적, 시간적 여유가 많은 '모하지맨'이 되었을 때 한 번 쯤 생각해보자.

 

희망의 낙원 에덴: 각성편 완료